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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속 미술관 “예보갤러리”
두번째 이야기 : 서예(書藝)편

2022년 겨울까지 예금보험공사(이하 예보) 사옥 내부는 ‘코로나19’의 잔재가 만연해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는 삭막한 표어와 경고문이 여기저기 붙어있었고, 직원들 사이에는 투명 가림판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팬데믹의 그늘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생동감 있는 조직이 되기 위해 사옥을 새로운 환경으로 탈바꿈할 필요가 절실한 때였다. 이에 예보는 사옥을 부드럽고 격조있는 공간으로 바꿔줄 다양한 미술품들을 곳곳에 전시하여 침체된 조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예보갤러리’ 그 두 번째 이야기로, 지난호(제53호) 미술품 소개에 이어 멋진 서예작품들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서예의 매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예보의 멋진 작품들
서예의 다채로운 매력 속으로

예보 본사에는 옛 선현들의 가르침과 영감을 주는 서예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10층과 15층에 위치한 여러 회의실의 한쪽 벽면에는 한자로 크게 휘갈겨 쓴 글귀들이 장엄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조용히 홀로 이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뜻은 잘 몰라도 액자 속 서풍(書風)에서 느껴지는 기품과 박력이 오롯이 전해져온다. 서예라는 예술이 지닌 힘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서예(書藝)란 말 그대로 문자(글)를 통해 작가의 감정과 정신세계를 먹과 붓으로 나타내는 예술이다. 먼 과거에는 서예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문자를 알고 붓을 쥔다는 것은 곧 권력을 쥐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문자보다는 사진이, 사진보다는 영상이 더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영상도 길이가 짧은 영상이 더 각광받는 이른바 ‘숏츠 시대’인데다 이제는 사람이 도맡아왔던 분야를 대신하는 AI까지 등장하였다. 그럼에도 서예가 주는 느림의 미학, 좋은 글귀가 주는 감동 때문일까. 서예는 예술의 한 장르로서 여전히 독보적인 존재가치를 유지해 오고 있다.

서예의 매력은 문자만 보고도 ‘글쓴이의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데 있다. 같은 글귀라도 작가의 서체나 표현방법에 따라 보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 된다. 오늘날 ‘라이브 서예 퍼포먼스(갈라쇼)’가 새로운 인기예술 장르로 자리 잡게 된 것도 글자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 써 내려가는 작가의 모습에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예의 또 다른 매력은 ‘문자의 아름다움’ 자체에 있다. 흘려 쓰는 듯 하지만 미적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문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시각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서예가 한자를 대상으로 하여 시작된 것도 상형문자가 지닌 조형적 요소 때문으로, 한자 문화권 안에서는 일찍이 한자를 예술적 감상의 대상으로도 삼아 왔다.

끝으로 매력 하나 더. 서예는 ‘좋은 글’을 남긴다. 좋은 글에는 작가의 철학과 가치관 뿐만 아니라 당대의 문화와 역사도 담겨 있다. 그 글귀가 후세에도 울림을 준다면 그것으로 시대와 문화를 잇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주요작품 설명

좋은 글을 남겼다는데 이 글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넘어가면 작가가 무척이나 섭섭하지 않을까. 피곤한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좋은 기운을 북돋워줄 것만 같은 4점의 서예작품에 담긴 뜻을 지금부터 알아본다.

1. 業興民安(업흥민안)
작품설명 “하는 일이 흥하니 백성이 편안해진다”라는 뜻으로, 국가나 정부가 행하는 정치·경제·교육 등 각종 제도나 사업 등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고 성공을 거두게 되면, 결국 국민이 행복해지고 사회가 안정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보 역시 예금보험제도 및 금융안정을 위한 기구로서의 중요한 업(業)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예금자들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보는 이러한 염원을 담아 10층 내 임원진 회의실을 ‘안민실(安民室)’로 명명하고, 최고 의사결정 시마다 예금자의 안정과 평안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

2. 金分輕重皆有道(금분경중개유도), 融成方圓終爲民(융성방원종위민)
작품설명 “금붙이는 가볍든 무겁든 모두 그 쓸모가 있다. 그것들이 녹으면 사각형도 원형도 될 수 있으나 결국 백성을 위해 쓰여지게 되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형태, 모양이 어떠하든 각자의 역할과 가치를 지니며, 시간이 흘러 변화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지닌 쓰임은 남아있다는 의미이다. 특히, 돈(예금)이란 많든 적든 모두 소중히 쓸 곳이 있고, 이 돈이 모여 큰돈이 되면 공장을 지을 수도 길을 닦을 수도 있으니 결국 모두 국민을 위해 쓰이게 된다. 예보도 국민들의 예금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잘 보호해야 한다는 암시를 주는 듯 하다.

3. 虛心竹有低頭葉(허심죽유저두엽), 傲骨梅無仰面花(오골매무앙면화)
작품설명 “가운데가 텅빈 대나무는 잎끝을 내리고, 강건한 매화는 하늘을 보는 꽃이 없네”라는 뜻으로, ‘겸손’과 ‘절개’를 강조하는 글귀이다. 대나무의 특성은 속이 비어 있고, 잎의 끝은 항상 아래를 향하고 있어 겸허한 품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매화는 그 꽃이 위를 바라보며 자라지 않아 세속의 권세에 눌리거나 아부하지 않는 기개와 절개를 나타낸다.

이 글귀의 지은이는 중국 청나라 시대 화가이자 문학가인 정섭(鄭燮, 1693~1765)으로, 그의 호를 딴 정판교(板橋)란 이름으로 유명한 자이다. 그는 백성을 사랑한 청렴하고 공정한 관료였으며, 관직을 그만두고는 양주(楊州)에서 자유롭고 호방하게 살았다. 정판교가 한 말 중 중국인이 가훈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난득호도(難得糊塗)’이다. 직역하면 “바보가 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라는 뜻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에게 모자란 듯 보이는 것이 진짜 현명한 처세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드라마 <호도현령 정판교> 포스터

한편 지난 2016년 중국에서는 정판교를 주제로 한 드라마 <호도현령 정판교>가 제작되어 방영되었다. 중국인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해당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OTT 서비스인 ‘왓챠’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

4. 善緣(선연) - 爲人皆善緣(위인개선연) 福同享(복동향)
작품설명 “사람들 모두 좋은 인연을 가지니 이로써 복을 함께 누린다”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인연(因緣)’에 관한 글귀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관계는 인연에 의해 결정되며, 이 인연은 우리 스스로 만들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인연을 통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행복을 나누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만난 예보인들 모두에게 전해지기를 염원한다.